이승만 건국 대통령 마지막을 보낸 하와이 병원에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그는 병실서도 늘 祖國 생각… 소원 물으니 "한국 돌아갈 여비요!"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서거 때까지 3년4개월 지내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02호실에 들어서자 작은 창문으로 태평양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마지막 나날을 보낸 곳이다. 이승만은 바다 건너 고국을 그리워하며 이곳에서 마지막 3년 4개월을 지냈다. 귀국이 좌절된 직후인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서거 때까지였다. 경사가 40도는 될 듯한 산길을 올라가야 했다. 마우나라니 하이츠 꼭대기에 있는 병원에 이틀간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입원 노인들이 운동하는 시간을 허락받아 16일(현지 시각) 오전 10시 병실에 들어갔다. 침대 셋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노인 세 사람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이승만이 있던 50년 전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다.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마우나라니는 '천국의 산'이라는 뜻. 하와이의 상징인 민둥산 다이아몬드 헤드와 와이키키 해변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내부 인테리어를 몇 차례 바꾸기는 했어도 건물은 그대로다. 이승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병원 어디에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마지막 삶을 보낸 곳임을 알리는 표지는 없었다.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동균(70) 부회장은 "병원 측에서도 안내 표지를 세우는 데 호의적이지만 대신 기부를 원하고 있다"면서 "병원 측과 협의해 이곳이 이승만 대통령이 마지막 날을 보내고 서거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병원 측은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에게 병실을 무료로 혼자서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현재 병실 사용료는 연간 1인 10만달러(약 1억1400만원) 수준. 사이 챈터비 병원장은 "당시 병실료는 모르겠지만 지금 3인실인 202호를 3년 이상 사용한다면 100만달러 정도 든다"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병원 뒤편 직원용 숙소를 내줬다. 양아들 이인수씨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침부터 밤까지 병실에서 남편을 돌보다 이곳에서 잠을 잤다. 병원에서 '베스트 와이프(best wife)'라고 소문이 났다. 지금은 방의 벽을 터서 널찍한 공간이 됐다. 재활용 운동 기구가 놓여 있었다.
6·25전쟁 때 이승만과 함께 전장(戰場)을 누볐던 밴 플리트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존경하던 영웅을 향해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올리고 있다.
이승만은 병실에서도 늘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병원장 일레인 존슨이 물었다. "이 박사님, 소원이 뭐예요?" 이승만이 대답했다. "여비요!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요!" "아직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세요?" "그래요!"
이승만은 6월 20일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퀸스 병원으로 옮겨 응급 처치를 하고 닷새 만에 다시 마우나라니 병원으로 돌아왔다. 7월 4일 양자 이인수씨가 서거를 대비해 호놀룰루에 왔다. 7월 18일 많은 피를 쏟으면서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주치의는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침대 곁을 프란체스카와 이인수,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세 사람이 지켰다. 호스를 입에 문 이승만은 잠시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이내 숨이 멎었다. "7월 19일 0시 35분, 임종하셨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인수씨에게 말했다. "얘야, 다른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말자꾸나."
영결식은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렸다. 이승만 자신이 1918년 세운 교회다. 1938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면서 광화문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광화문 모양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은 이승만 아니면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같은 모양으로 개축했다. 마우나라니 병원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1965년 7월 21일 오후 8시 30분 열린 영결식에는 현지인과 교민 700여명이 모였다. 하와이 주요 방송 매체도 이날 오후 애도 방송을 했다. 예배당 앞 중앙에 이승만이 누운 관이 놓였고 그 위에 태극기를 덮었다. 영결식 중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상반신 쪽 관 뚜껑 반을 열어 놓았다.
이인수씨는 이승만의 '50년 친구' 윌리엄 보스윅(Borthwick)의 조사(弔辭)를 지금도 기억한다. 보스윅은 이승만의 관 앞으로 다가서더니 고인의 얼굴에 덮여 있는 베일을 걷어냈다. 그는 친구의 이마에 손을 대고 울먹이면서 절규했다. "내가 당신을 알아요, 내가 당신을 알아(I know you, I know you). 당신이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내가 잘 알아요. 친구여, 당신이 애국심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얼마나 비난받고 살아왔는지 내가 잘 알아요. 사랑하는 친구여, 잘 가시오…." 장의사였던 보스윅은 1920년 가을 상하이로 가는 배에 중국인 유해가 놓인 관 사이에 이승만을 숨게 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갈 수 있도록 도왔던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보스윅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해 감사를 표했다.
한 시간 영결 예배 후 영구는 히캄 공군기지로 향했다. 6·25전쟁 때 이승만과 함께 전장(戰場)을 다녔던 밴 플리트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 본토에서 날아와 고인의 마지막 길에 동행하겠다고 했다. 서울로 향하는 C-118 미군 특별기는 7월 21일 밤 11시 날아올랐다.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조국으로 5년 2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영구는 7월 23일 오후 3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정부는 국장보다 낮은 국민장을 권했다. 이인수씨는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했다. 이화장에서 사흘간 조문객을 맞은 후 27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를 한 후 오후 5시 45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수십만 시민들이 시청 앞 광장에 나와 '거인'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당시 언론은 '인파 수십만이 장장 30리(약 12㎞)에 이어져 영구 행렬을 따랐다'(조선일보 1965년 7월 28일)고 전했다. 이인수씨는 "국장 같은 가족장이었다"고 회고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옆에는 이승만 동상이 서 있다. 1985년 교민들이 세운 것이다. 동상 아래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라고 새겼다. 정작 고국 묘비에는 '건국'이란 말이 없다. 당초 묻힐 때는 비석조차 없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서양에서 묘비 없는 무덤은 죄인밖에는 없다. 이 박사가 죄인인가"라고 해서 5년 후 세운 묘비의 글이 '우남 이승만 박사의 묘'였다. 프란체스카를 합장한 후인 1998년 유족이 '건국 대통령'이라고 새긴 비석을 만들고 이를 세우려 했으나 일부 정치권이 반발해 결국 '초대 대통령'으로 바꿔 세웠다. 이인수씨는 "그 비석을 현재 비석 오른쪽 뒤편에 묻었다. 언젠가 반드시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 하와이 망명 안해… 여행 후 돌아가려는데 당시 정부가 귀국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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