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감기몸살로 몸이 아파서 병원에 다녔습니다. 약을 계속 먹었는데도 열이 떨어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추석을 맞이하여 시댁 형제들과 시부모님 산소가 있는 시골에 갔었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아프니까 가지 말라고 했지만, 좀 참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동행을 했습니다.
시골에 내려간 이튿날부터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산부인과 하시던 큰 시누께서 저의 상태를 보시고, 간단한 약과 주사를 놓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면 병원에 가서 자세히 검사를 받아보자고 하셨습니다. 급히 올라온 우리는 그 다음 날 시화병원에 가서 자세히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듣고 나온 남편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남편은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운전만 하였습니다. 저 또한 초조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남편이 입을 열었습니다. 남편은 떨리는 목소리로“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무엇보다도 본인이 굳은 의지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어. 절대 약해 지지마. 검사결과가 너무 안 좋아.”라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얼마나 안 좋은 건데?”조금 시간이 지나서 물었습니다. 췌장암 말기인데 지금은 수술도 할 수 없고, 항암제나 다른 약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며, 시기가 늦어져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말을 하였습니다. “의사는 못 고쳐도 내가 고쳐줄게.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용기를 주었습니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 여기저기 병원에 전화로 예약을 하였습니다. 삼성의료원, 일산 국립암센터 등 여러 병원에 예약을 하여 검사를 받아봤지만, 모두 췌장암 말기 판정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길어야 3개월 또는 그 전에라도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통증이 덜할 때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지고, 통증이 더 심해지면 그때 병원에 오라고들 했습니다. 저는 눈물도 안 나오고, 실감도 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 걱정 되었습니다.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암에 좋다고 하는 것들, 각종 버섯, 한약, 식품, 민간요법 등 좋다고 하는 것들을 다 구해다 저에게 먹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증은 나날이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몇 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저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어느 날은 새벽에 심한 통증과 온몸을 엄습해오는 오한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그 오한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윗니와 아랫니가 무리하게 부딪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일로 이가 다 상해서 지금은 양쪽어금니를 임플란트와 금으로 모두 씌울 정도였습니다. 그날 밤 혈압이 떨어지고, 앞도 보이지 않았으며, 귀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구급차에 실려 간 저는 응급처치 후 바로 중환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날이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여보! 정신차려봐.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돼.”라고 말하며 제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나 지금 예배시간이 다 되어서, 교회에 갔다 올게. 당신은 누워서라도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께서 꼭 낫게 해주실 거야.”라고 말하는 남편의 얼굴은 밤새 중환자실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의식을 찾은 저는 의사 선생님과 상의하여 일반 병실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일반 병실에 와서도 통증으로 인해 몹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통증을 다
스리는 약은 사람을 잠만 자도록 할 뿐이었습니다. 밥도 먹지 못하고 얼굴은 점점 황달로 변해가고, 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호흡도 곤란해지고, 말하기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제 마지막인 것 같다고 마음의 준비와 장례 준비를 하라고 남편에게 말하였고, 상주가 될 아들에게 입힐 검정 양복도 맞추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집에 그 양복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날 남편은 아픈 저에게 머리를 감겨주고, 목욕을 시켜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와 살면서 잘못한 것들을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발 죽지 말라고, 우리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자고, 앞으로 살면서 더 잘해주겠다고 애절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손을 꽉 잡으며,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차라리 저의 생명을 데려가시고, 착한 제 아내를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제 앞에서 눈물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남편인데…, 저 또한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착하고 성실한 남편을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며, 그날 남편과 저는 서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병실은 1인실이기에 저와 남편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해가 뜰 때까지 찬양과 기도로 그날 밤을 꼬박 보냈습니다. 그 다음 날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찬양과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는 중에“딸아! 딸아!”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귀에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너를 치료하리라. 지켜주노라. 사랑한다. 사랑한다. 딸아!”하시면서 주님께서 제 마음에 오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그 새벽에 저는 너무 기뻐,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너무 고맙습니다!’그 자리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던 남편도 일어나 어찌된 일이냐고 묻고는 둘이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다음 날 밤에도 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제 마음 속에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저는 조금씩 열도 떨어지고,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아 드디어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기적이 일어났다고, 지금까지 저 같은 환자는 본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은 의사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지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환자에게 해준 것이 없고, 오직 진통제만 썼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퇴원해서 집에 돌아온 저는 몸 상태가 나날이 좋아져 갔습니다.
그 뒤로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암 환자였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 정도로 건강합니다. 그동안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저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신 주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대명 교회 글 에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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